제32대 서울특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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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3월 제 14대 총선이 있었다. 민자당 대표 김영삼은 프라자호텔에서 이명박을 만나 서울 강남을에 민자당 후보로 출마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이명박은 김영삼의 제안을 거절했다. 출마를 할 경우 정주영의 국민당 후보와 싸워야했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차에 김영삼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상도동 자택에서 조찬을 하면서 김영삼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지역구로 나가면 국민당 때문에 곤란하다고 하니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나와 달라는 것이었다. 1992년 5월, 이명박은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당시 정치권은 그해 12월에 있을 제 14대 대선 열풍이 한창이었다. 민자당 지도부는 이명박에게 TV에 나와 국민당 대선 후보 정주영에 대한 네거티브 연설을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를 거부하면서 3년 뒤인 1995년 제1회 지방선거 민자당 서울시장 경선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패배했다.

이명박은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네거티브 정치를 반대하고, 보스주의 붕당정치에 저항했으며, 지역주의를 타파하고자 노력했다.

실용과 효율을 중시하는 기업 CEO 출신의 이명박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3김시대의 기성정치인들에게 그런 모습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이와 관련해 이명박은 기업 CEO 출신인 자신이 정치권에서 ‘이방인’같은 존재였다고 회상했다.

기성정치권의 견제는 이명박 제15대 총선에서 종로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극대화됐다. 종로는 정치1번지라고 불릴 정도로 한국정치의 중심인 지역구였다. 그 곳에서 이명박은 노무현 후보와 4선 중진의 정치거물인 이종찬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정치신인으로 지나치게 빨리 중앙정치에 진출하면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결국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고 제2회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도전에도 실패하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이명박은 1998년 11월 조지워싱턴대학 객원연구원으로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떠나게 됐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그 동안 일에만 빠져 살던 이명박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그 동안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됐다. 마트에 가도 예전엔 입지조건이나 상품경쟁력부터 살폈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됐다.

‘일’에서 ‘사람’으로 관점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환경과 문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이명박은 보스턴시의 ‘빅 딕 프로젝트(Big Dig Project)’를 접하게 됐다. 빅딕은 보스턴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녹지를 건설하는 사업이었다.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자동차는 지하 전용도로로 다니고 지상에는 지평선 너머까지 거대한 푸른 공원이 펼쳐진다고 했다. 효율성과 비용, 공사기간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보스턴 시민들은 이 낭만적이 계획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타호 호수를 방문했을 때에는 주변상가의 하수를 호수로 흘려보내지 않고 따로 하수처리 시설을 만들어 처리하는 모습을 봤다.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적극적인 개발을 통해 환경을 더욱 깨끗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미국을 보면서 이명박은 우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환경을 있는 그대로 보존할 것인가, 아니면 개발을 위해 환경의 훼손을 감수할 것인가를 놓고 좌우가 갈려져 싸우는 모습들...

왜 서울시장이 되려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이전까지는 서울을 개발해 물질적 풍요를 누리도록 하겠다는 생각이 컸다. 그러나 미국에서 얻은 영감을 통해 문화와 환경, 복지가 중심이 되는 사람 중심의 서울을 생각하게 됐다.

1999년 11월, 미국에서 돌아온 이명박은 청계천을 찾았다. 한 때 산업화의 상진이었던 청계천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낡은 모습이었다. 더 큰 문제는 청계천 복개 구조물과 고가도로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청계고가도로를 허물고 청계천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그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여러 전문가들을 만났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교통전문가들은 교통대란을 우려했고, 도시학자들은 청계천 주변 22만 상인들의 반발을 걱정했다. 토목 관계자들도 건설은 가능하나 수많은 이해관계를 조정할 소프트웨어가 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서울시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러자 전문가들의 의견과는 달리 서울시민들은 청계천 복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높았다.
이명박은 용기를 얻었다. 현대시절 수많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 일이 떠올랐다.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단 1퍼센트의 가능성만 있다면 나머지 99퍼센트는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02년 6월, 제3회 지방선거가 실시됐다. 이명박은 청계천 복원 공약을 비롯해 대도시 서울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의지와 추진력을 가진 시장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결국 181만여 표를 얻어 52.3퍼센트의 득표율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취임식이 끝나자 서울시 국장급 공직자 몇 사람이 이명박을 찾아와 봉투를 내밀었다. 지방선거 당시 서울시 공직자 상당수가 청계천 복원을 반대하며 여당후보에게 도움을 줬다. 봉투는 그들의 명단이 들어있는 일종의 살생부였다.
몇 차례 찾아와 설득을 했지만 이명박은 살생부를 보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청계천 복원은 서울시 공직자 전원이 달라붙어 해도 될까 말까 하는 일이었다. 안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대다수인 상황에서 일부만 데리고 일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결국 서울시 공직자들 사이에 소문이 났다. 노심초사하고 있던 공직자들은 시장이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그리고 그 일은 서울시 공직자들을 하나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이명박은 청계천 복원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추진본부와 복원 연구단, 시민위원회 등 3개 조직을 구성하고 청계천 복원 작업에 들어갔다.
청계천 복원이 가시화될수록 이해 당사자들의 비판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언론도 합세해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냈고, 당시 대중화되기 시작한 인터넷에도 비방과 이명박 시장에 대한 인신공격이 넘쳐났다.
서울시 공직자들은 비난 여론이 큰 청계천 복원을 추진하다 자칫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불이익을 당할까 우려하는 눈치였다. 이명박은 청계천 복원 사업과 관련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본인이 책임지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명문화했다.
또한 시민들에게 복원의 타당성을 알리고 여론을 모아가기 위해 2002년 8월 13일, 청계천 복개도로 밑을 시민들과 함께 체험하는 청계천 투어 행사를 열었다.
복개도로 밑은 악취와 습기가 가득 찬 암흑 천지였다. 광교를 비롯한 문화재들은 검은 오물에 뒤덮여 방치되어 있었고, 복개도로와 고가도로를 바치고 있는 구조물들은 육안으로 보아도 상당히 부식되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저기 불 좀 비춰보세요. 저거 새싹 아니에요?”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개똥참외 씨앗이 낡은 상판의 갈라진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에 의지해 싹을 틔운 것이다. 그 모습에 크게 감동받은 이명박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청계천을 복원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청계천 복원의 가장 큰 난관은 상인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이명박은 서울시 공무원 중 일꾼들만을 골라 ‘상인팀’을 만들었다. 상인팀은 문전박대를 받으면서도 무려 4,200번이나 상인들을 찾아가 안면을 익히고 친분을 쌓았다.
백인백색의 상인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그들의 일을 자기 일처럼 처리해줬다. 심지어는 영업장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상인팀의 이 같은 노력 끝은 2003년 6월 말, 청계천 상인들의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난관은 청계천 주변의 노점상 문제였다. 청계천 주변은 노점상들의 시위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대책을 고심하던 중 이명박은 동대문운동장에 눈을 돌렸다. 상암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생기면서 동대문운동장 축구장은 그 용도가 다해 몇 년 안에 공원화 할 계획이었다.
그 때까지 동대문운동장을 노점상들이 이용하도록 하기로 결정했다. 동대문운동장은 ‘동대문풍물시장’으로 이름 지었다. 주차장 등 편의시설도 지어 접근성도 용이하게 했다. 이 같은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문을 연지 1주일 만에 동대문풍물시장은 서울의 명물이 됐다.
노점상들의 매출도 크게 늘어나면서 끝까지 저항하던 노점상들도 동대문풍물시장에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2005년 10월 1일, 마침내 청계천이 복원됐다. 도심 내의 대규모 하천 복원사업은 세계적으로도 그 사례가 드문 일이었다. 복원된 녹지와 하천을 따라 바람 길이 만들어지면서 청계천 주변지역의 평균기온은 3.5℃나 내려갔다.
우려하던 교통대란도 없었고, 물고기와 새들도 돌아와 동식물도 500종 가까이 늘어났다. 복개도로 밑에서 오물을 뒤집어쓰고 방치되던 역사적 유적과 유물도 복원되면서 600년 고도의 역사성도 회복했다.
도심 한복판에 휴식공간이 마련되자 하루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청계천을 찾았다. 그로인해 청계천 주변의 상권도 활성화 되면서 서울시 경제에도 크게 기여했다.
국제사회의 관심도 컸다. 2004년 베니스 국제 건축 비엔날레 최우시 시행자상에 이어 2006년에는 일본토목학회 환경상을 받았고, 2007년에는 아시아 토목공학대회에서 수상했다. 2009년에는 UN 해비타트 특별대상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건축 및 도시설계학과에 ‘청계천 스튜디오’ 강좌가 개설되어 석·박사 과정에 있는 학생들이 청계천 답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세계 많은 도시들은 2년여 만에 완성된 청계천 복원사업을 주시했다. 단순히 하천을 복원하는 개념을 떠나,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심각한 갈등을 딛고 단기간에 풀어나간 서울시의 의사결정과정과 추진력에 큰 관심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청계천 복원은 서울이 개발주의 시대를 마감하고 사람 중심의 친환경적 도시로 다시 태어나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데 의미가 컸다.
1960~80년대 서울시 시내버스는 중요한 대중운송수단으로 산업화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시민의 편의나 안전보다 효율에 중점을 주다보니 출퇴근 시간이면 시내버스는 비현실적으로 많은 사람을 짐짝처럼 실어 날랐다.
민소득이 높아져 집집마다 자가용이 생기고 지하철이 확장 개통되면서 시민들은 점차 불편한 시내버스를 외면하게 됐다. 버스 이용객들이 줄어 적자에 시달리게 된 버스회사들은 모두 이익이 나는 황금노선을 지나려 했다.
버스회사들은 서울시에 노선변경을 끊임없이 요구했고, 시민들도 자신의 집 앞에 더 많은 버스가 지나가길 원했다. 서울시가 이 같은 민원에 밀리면서 서울시 시내버스 노선은 엉킨 실타래처럼 왜곡되어 갔다.
그로 인해 인기지역은 가까운 거리도 구불구불 돌아가고 중복노선이 많아졌으며, 반면 수익성이 없는 곳은 아예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시민들은 시내버스를 더욱 외면했고, 수익성이 악화된 버스회사들은 다시 노선변경을 요구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그 과정에서 서울의 버스업계는 급격히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시내버스 이용 감소가 자가용 운행을 늘리면서 서울시 대기를 오염시키는 등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이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취임 전부터 버스노선 개혁을 공언했다. 대중교통 개혁의 목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도심의 차량 유통속도를 높여 도시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둘째는 자가용 운행을 줄여 도시의 대기오염을 줄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서민들의 교통 불편과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시내버스 개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천 개에 달하는 버스노선을 하나하나 버스회사와 싸움을 해가며 조정하기에는 서울시의 인력과 시간이 부족했다.
“시장님, 다른 건 몰라도 버스 노선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참모들이 일제히 버스개혁을 만류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역대 시장 때도 몇 번이나 버스개편을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업체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고, 담당 공무원들은 무슨 일인가에 연루돼 구속되는 악순환이 반복된 것이다.
대중교통체계 개혁이 지난한 과제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명박은 어렵다고 포기하거나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서울시장에 취임하면서 CEO의 입장에서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일을 반드시 해내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대중교통 개혁의 첫 단추는 서울시 교통국의 인력을 모두 교체하는 일이었다. 교통국 인력들은 수년에서 수십 년간 버스회사와 협의를 거쳐 교통정책을 입안한 사람들이었다. 예상되는 유착관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인력교체가 필수적이었다.
다음은 로비를 통해 물밑에서 이루어지던 과거의 방식이 아닌 공개적이고 투명한 의견수렴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시민단체와 시정개발연구원, 서울시 교통 전문가, 버스조합과 버스노동조합, 마을버스조합으로 구성된 ‘버스개혁시민위원회’가 2003년 8월 구성됐다.
초기에는 고성이 오가기도 했지만 회의가 계속되면서 점차 실마리를 찾아갔다. 모든 것이 공개된 자리에서 버스회사들의 자신들만의 욕심을 차릴 수 없었다. 한쪽에서 욕심을 부리면 다른 쪽에서 견제하고 나섰고, 그 과정에서 의견이 조율됐다.
버스개혁시민위원회가 택한 대안은 ‘준(準)공영제’였다. 버스노선이 왜곡된 것은 황금노선을 차지해 승객을 많이 태워야 버스회사의 수익이 늘어나는 구조에서 비롯됐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 준공영제였다.
준공영제는 경영은 각 버스회사에 맡기되, 수익금은 공동관리기구가 모두 모아 각 노선별 운행비용(대·km)에 따리 버스회사에 배분하는 방식이다. 준공영제가 되면 버스회사도 더 이상 황금노선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결국 버스회사들은 기존 노선을 모두 반납하기로 하고, 서울시는 데이터를 토대로 백지 위에 새로운 버스노선을 반듯하게 그릴 수 있었다.
또한 버스중앙차로제를 확대하고 환승시스템을 도입했다. 버스 중앙차로제는 도로의 중앙차선을 시내버스 전용차선으로 만들어 통행속도를 높이고 자가용 운행을 자제시키기 위한 방안이었다.
중앙버스 정류장에는 승객들이 눈과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쉘터를 세우기로 했다. 쉘터는 건설과 유지를 민간회사에 위탁했다. 민간회사는 자기 비용으로 쉘터를 건설·유지하는 대신 버스정류장의 옥외광고로 수익을 충당하는 방식이었다.
서울시는 프랑스의 세계적인 광고회사와 위탁계약을 체결했고, 그 결과 시민이 낸 세금은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세계 최고 수준의 디자인을 갖춘 쾌적한 쉘터를 운영할 수 있었다.
또한 환승시스템은 전철과 시내버스, 마을버스를 갈아탈 때마다 기본운임을 내던 기존 방식과 달리 환승횟수와 교통수단에 관계없이 이동한 거리만큼만 운임을 내는 제도다. 이를 위해 IT 기술을 접목하여 IC 칩이 내장된 교통카드를 채택했다.
방향이 정해지자 서울시는 본격적인 교통체계 개편 작업에 돌입했고, 2004년 7월 1일, 드디어 새롭게 개편된 교통체계가 서울시 전역에 실시됐다.
“교통카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교통카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교통체계 개편 후 서울시청의 민원 전화는 모두 폭주상태였다. 몇 십년간 유지되던 교통체계를 하루아침에 바꾸는 일이었다. 혼란이 전혀 없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태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교통체계 개편은 기획 단계부터 반대가 거셌던 정책이다. 언론에서는 교통체계 개편으로 인한 혼란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심지어는 대중교통이 ‘대중고통’이 되었다는 기사까지도 나왔다. 인터넷에서도 비난과 욕설이 넘쳐났다.
2004년 7월 4일 저녁 7시, 이명박은 기자회견을 열어 혼란에 대해 서울시민들에게 사과하고 대책 안을 발표했다. 발표가 끝나자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교통체계 개편이 아직도 적절한 정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본래의 방향은 옳은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오류는 수정될 것입니다.”
이명박은 기자의 질문에 어느 때보다도 확신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장 문제가 발생하고 비판이 쏟아진다고 해서 믿음까지 흔들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몇 달 만에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문제점들이 개선되면서 운행속도는 눈에 띄게 빨라졌다. 서비스도 개선되고 교통카드 시스템도 안정됐다. 서민들도 달라진 대중교통 체계의 장점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새 비판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시민 만족도는 크게 상승했다.
이 같은 성과가 나오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무현도 2004년 9월 13일 국무회의에서 청와대와 정부가 이명박 서울시장을 본 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일시적으로 여론이 어렵고 역풍이 불 때라도 취지가 정당하고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꾸준히 밀고 나가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청와대 참모를 비롯해 정부 각료 모두 정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런 확신을 밀고 나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국제사회에서도 서울시 교통체계 개편이 모범적인 사례로 손꼽히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04년 10월, 영국 국회 교통위원회 소속 의원 6명이 런던 교통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서울을 방문했다. 귀네스 던우니 영국 교통위원회 의원장은 개편성과를 둘러본 소감을 언론에 이렇게 표현했다.
“서울처럼 하루아침에 런던의 교통체계도 몽땅 다 뜯어고칠 수 있다면 서울시의 교통체계개편 추진 팀을 모두 런던으로 모셔오고 싶은 심정입니다.
뚝섬에는 경마장과 골프장이 있었다. 그러나 1989년 과천경마장이 개장하면서 뚝섬경마장은 문을 닫았다. 골프장도 1994년 문을 닫으며 전임 시장이었던 조순은 이 곳에 상가와 주거지역을 조성하는 대규모 개발개획을 세웠다.
서울시장 취임 후 뚝섬 개발개획을 살펴보던 이명박은 의문을 가졌다. 버려진 땅이라고 무조건 대규모 개발계획을 세우는 것은 안일하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기존 개발 계획을 모두 취소하고 녹지를 조성하기로 마음먹었다.
반대가 없을 리 없었다. 당장 서울시 내부로부터 반대의견이 나왔다. 기존 계획대로 뚝섬을 상업용지로 매각하면 최소 5조 원의 서울시 재정이 확보된다는 것이었다.
서울시 재정형편 상 5조 원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이명박은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당장은 손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환경적 가치가 높아지면 결국 경제적 가치도 높이지지 않을까? 그리고 그 혜택은 지역주민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결국 뚝섬을 장대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자라는 우거진 숲과 많은 물이 흐르는 연못, 그리고 가족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잔디밭으로 구성된 친환경적 생태공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2005년 6월 18일, 서울숲이 개원했다. 서울숲이 생김으로써 비로서 서울은 친환경적 도시의 모양새를 갖췄다. 광화문에서 청계천과 중랑천을 거쳐 뚝섬에 이르는 그린 네트워크가 완성된 것이다.
세계적인 대도시들의 시청 앞에는 광장이 있다. 접근성이 용이한 도심에 광장을 두어 시민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서울시청 앞은 교통이 가장 복잡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시청 앞 광장 조성은 꼭 필요한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교통체증을 유발할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가 심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취임 후 과학적 시뮬레이션을 통해 서울광장 조성 후 예상되는 교통 상황을 면밀히 검토했다. 결과는 우려와 달리 교통상황이 크게 악화되지 않는 것으로 나왔다.
여론조사를 해 보니 서울시민들도 서울광장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물론이고 일부 서울시 간부들은 여전히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명박의 지속적인 설득 끝에 서울시 간부들의 의구심도 점차 사라졌다.
마침내 공사가 착공됐다. 여전히 상당수 언론과 전문가들은 광장 개장 후 틀림없이 교통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2014년 5월 1일, 수많은 취재진이 서울시청 옥상에 모여들었다. 서울광장 개장도 큰 뉴스였지만, 개장 후 예상되는 교통 혼잡 상황을 보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교통 혼잡은 없었고, 오히려 그날 서울광장에 몰린 엄청난 인파가 뉴스거리가 됐다.
서울광장 조성 후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겨울철이 다가오면서 잔디보호를 위해 서울시에서는 서울광장을 폐쇄하기로 했다. 서울광장에 시민들의 발길이 끊길 것을 생각하니 이명박은 마음이 좋질 않았다.
그래서 겨울철에도 서울광장에 시민들이 찾아올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던 중, 과거 유럽 출장 중 보았던 파리 시내의 스케이트장이 떠올랐다. 서울광장에 스케이트장을 조성하는 방안을 이야기하자 서울시 공직자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준비된 예산도 없고, 안전사고의 위험도 있을뿐더러, 비싼 잔디가 훼손될 우려도 크다는 것이었다. 스케이트장 조성이 좌초 위기에 처하자 이명박은 관료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검토를 부탁했다. 마침 유인촌이 서울문화재단을 맡고 있었다.
유인촌은 “광장 둘레의 돌바닥 위에 아담하게 스케이트장을 만들면 잔디의 손상도 없고 기술적으로도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며 “스케이트장을 만들면 파리시청 앞 스케이트장처럼 서울의 명소가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에 힘을 얻은 이명박은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그 결과 금융업체의 협찬을 받아 그해 크리스마스 전에 스케이트장을 개장할 수 있었다. 스케이트장은 개장 첫날부터 대박을 터뜨렸다. 협찬사인 금융업체도 마케팅 사상 최고의 성공사례로 꼽았다.
시청 앞 스케이트장은 전국에 스케이트 붐을 일으키면서 비슷한 개념의 스케이트장이 전국 곳곳에 생겨났다.
서울시에만 연간 7,000~8,000명의 고등학생들이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있었다. 이명박은 이들을 돕는 것이 자신이 과거 중학교 선생님과 청계천 헌책방 주인, 그리고 이태원 시장 상인들로부터 받은 도움을 사회에 돌려주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생각을 밝히자 공직자들은 난감해했다. 지방자치와 교육자치가 분리되어 있어 예산 편성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논의 끝에 1년에 100억 원 정도 장학금을 지급할 방안을 찾아내고 서울시내 고등학교 교장선생님들을 초청했다.
“등록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의 이름을 서울시에 제출해 주십시오. 서울시가 다른 서류 없이 등록금을 모두 책임지겠습니다. 다만 그 학생이 서울시 장학금을 받는다는 사실을 다른 학생들이 모르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 ‘하이서울 장학금’이다. 장학금 지급이 결정되자 공직자들은 학생들을 모두 초청하는 성대한 행사를 준비했다. 그 사실을 보고받은 이명박은 깜짝 놀라 만류했다.
“도움을 받는 아이들 입장에선 어려운 가정형편이 공개되는 것이 싫을 수도 있습니다. 장학금 지급 사실을 비밀로 한 것도 그 때문인데 이런 행사가 적절하겠습니까?”
가난했던 어린 시절 본인의 경험이 우러난 말이었다. 행사를 취소하는 대신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서울시에서 지급하는 장학금은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빌려주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형편이 좋아지면 자신이 다니던 학교, 자신과 같이 도움이 필요한 후배들에게 돌려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한 조치였다.
서울시장에 취임한 후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이명박은 예전에 살던 달동네를 찾았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달동네는 변함이 없어 보였다. 동네를 둘러보는데 자물쇠로 잠긴 단칸방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문을 열어보게 했다.
방 안에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젊은 부부가 일을 나가면서 치매 걸린 어머니가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밖에서 문을 잠근 것이다. 텅 빈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밥그릇이 발길을 잡았다.
시청에 돌아온 후 이명박은 실무자를 불러 이런 식으로 방치된 치매노인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조사 결과 서울 시내에만 이런 가구가 약 1,300여 세대 있었다. 즉시 재원을 마련해 ‘치매노인요양병원’을 짓는 일을 추진했다.
병원 건립은 쉽지 않았다. 그런 시설이 들어선다면 동네 집값이 떨어진다며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6년, 서울 망우동에 치매, 중풍 등 노인들을 위한 북부 노인병원이 개원했다.
그 외에도 중증 장애인을 위한 중증장애인콜택시와 장애인을 위한 저상버스를 만들고, 모든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여 사회적 약자의 이용편의를 늘리며, 자동차 중심이었던 교차로에 횡단보도를 설치하는 등 사람 중심의 도시를 지향했다.
교향악단은 한 도시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다. 뉴욕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등 세계적인 교향악단들은 그 도시의 문화 수준과 평판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에 반해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은 서울시민들조차 외면할 정도로 수준이 낮았다. 이명박은 취임 후 서울시향의 수준을 높이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서울시향 단원들은 강성노조인 민주노총에 가입해 있었다. 개혁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자신들의 요구를 실력행사를 통해 관철시키려고 했다.
고심 끝에 이명박은 정면충돌을 피하고 새로운 방법을 택했다. 기존의 시향과는 별도로 또 하나의 수준 높은 교향악단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시향이 만들어지자 기존 시향이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반발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원칙을 고수했고 결국 기존 시향의 단원들도 오디션에 합격해야 합류할 수 있었다.
2005년 8월 15일은 광복 60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서울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행사를 준비했다. 먼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서울시청 건물을 3,601장의 태극기로 뒤덮고 그날 저녁 서울광장에서는 야외 클래식 음악회를 열었다.
행사 당일 서울광장은 3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새로운 시향이 연주하는 ‘광복 60주년 기념 서울광장 음악회’의 마지막 연주는 ‘코리아환타지’였다. 교향곡의 마지막에 애국가가 연주되자 3만 여명의 시민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모두가 하나 되어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합창했다. 연주가 끝나자 시민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광복 60주년을 맞는 한여름 밤의 서울광장은 감격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