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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똑똑이 안보 여론과 위정자의 책무김태효 | 2015.11.30 | N0.69

김태효 <전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


여론은 수시로 변하는 '관전자', 주도할 책임은 지도층에 있어
모순된 두 목표 동시에 원하는 헛똑똑이 안보 여론 잘 다스려
진짜 똑똑한 외교 펴야 할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대통령


최근 논문을 하나 쓰면서 한국인의 정치와 안보 이슈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검토해 보았다. 국내외의 주요 조사 기관별로 다소 편차가 있었으나 응답의 패턴은 유사했다. 국민은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믿으면서도 투표할 때는 아직도 후보자의 출신 지역을 주요 변수로 고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김 정치가 권력을 창출하고 유지한 핵심 수단도 능력보다는 충성도에 따라 작동하는 보스 정치, 계파 정치였다는 점에서 반민주적인 방식이었다.


대외 관계에 관한 여론도 이중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매한가지다. 북한의 도발에 강력하게 응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남북 대화가 필요하다고 보는 의견도 다수를 차지한다. 김정은 정권에 들어와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졌다는 것이 중론이고, 북핵 문제의 바람직한 해법에 대해서는 '6자 회담 협상에 의한 평화적인 해결'이 항상 최다 응답을 차지한다. 대다수 국민은 한·미 동맹이 한국 안보의 핵심 중추라고 대답하는 동시에 한국이 외교의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믿는다. 미국과의 동맹도 잘 지키고 중국과도 잘 지내야 한다는 전제하에 두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 쪽에 일방적으로 끌려 다녀서도, 어느 한 쪽을 섭섭하게 해서도 안 된다고 믿는다. 아베 내각이 추진하는 집단 자위권에 반대한다는 의견도, 악화된 한·일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의견도 둘 다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겉으로는 아는 것이 많아 보이지만 정작 알아야 하는 것을 모르거나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을 헛똑똑이라고 부른다. 민심은 천심이듯 국민의 마음은 자연의 순리와 보편적인 상식에 기초한다. 하지만 동시에 여론은 서로 모순 관계에 있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충족시켜야 한다고 믿는 이중성을 지닌다. 여론은 수시로 변한다. 여론은 위정자의 판단에 영향을 주는 동시에 위정자들이 내린 정책의 결과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여론은 관전자일 뿐 나라의 정책을 직접 결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주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무책임하다. 안보와 외교는 국내 정치와 달리 나라 밖의 당사자가 여럿이고 한번 잘못 내린 결정은 오래도록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소위 사회의 지도층은 여론의 거울인 동시에 여론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그 책임이 막중하다. 언론은 국민의 인식과 정부의 정책을 연결하는 가교다. TV와 인터넷 언론이 시청자의 초기 인식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신문은 지식인 사회의 담론 형성을 주도한다. 언론이 상업주의에 경도돼 수요자의 감성을 지나치게 자극하면 여론이 춤추게 된다. 학자들이 각자의 전문 영역에 천착하지 못하고 시류에 영합하면 사회의 지적(知的) 내공이 빈약해진다. 주요 정책의 입법을 담당하는 정치인들은 그 존립 기반이 유권자의 투표라는 점에서 여론의 시류에 끌려 다닐 가능성이 가장 큰 집단이다. 능력과 전문성이 존재의 이유인 행정 부처들이 조직 이기주의의 볼모가 되어 예산만 탐내고 힘든 일을 회피한다면 중요한 과제는 방치되고 인기 위주의 전시(展示) 행정이 득세하게 된다.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의 IT 업계를 찾아 무한 경쟁 시대의 생존과 영광의 비법을 탐문해보니 결정적인 변수가 창업 CEO의 비전과 결단이었다. 헛똑똑이 안보 여론을 잘 다스려 진짜 똑똑한 외교를 펴야 할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바로 대통령이다.


임기 2년을 남긴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신뢰'에 바탕을 둔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상대를 놓고 어떠한 남북 관계 프로세스를 추진할 것인가의 문제요, 저마다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주변국들에 어떠한 국제 공조 방안을 제시할 것인가의 문제다. 8·25 합의에서 '남북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 분야의 대화와 협상을 진행하고(1항) 다양한 분야에서의 민간 교류를 활성화하기로(6항)' 했지만, 우리 당국이 상대하는 북한에는 민간이라는 주체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민간의 직함을 가지고 우리 민간단체와 기업을 상대하면서 철저한 북한 당국의 조종에 따라 대남 목표를 추구할 뿐이다. 북한 정권이 원하는 현금과 전략 물자를 다시 제공하는 방법으로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고 5·24 조치를 해제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반면 북한 주민들에게 직접 전달되고 북한 사회의 개혁·개방에 도움이 되는 경제 협력 방안에 북한 당국과 합의하기란 매우 어렵다. 아무리 외교를 잘한다 해도 지금 상황에선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남북 관계는 기대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지도자는 쉽고 빠른 길의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재임 중에 받을 일시적인 평가보다는 나중에 점차 세월이 가면서 내려질 역사적 평가를 생각해야 한다.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보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1/29/201511290231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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